영암 월출산
신령한 바위가 산이 되어 마을을 수호하는 고장, 영암(靈巖). 호남평야의 비옥한 대지위에 우뚝 솟은 월출산(809m)은 영암의 기둥이자 아버지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제 몸을 두른 의지가 영암의 기개요 자존심이기도 하다. 영암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어디에 머물러도 고개만 돌리면 수호자 월출산의 보살핌을 받는다. 월출산의 기를 받으며 사는 영암 사람에겐 자연이 삶의 일부고 월출산이 곧 자연의 아버지가 된다.
3월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아 기(氣)의 고장 영암을 찾았다. 일상에서 스트레스와 피로로 기력을 잃었다면 자연에서 활기를 얻을 수 있는 영암을 추천한다. 기찬묏길에서 청정트레킹을 즐기고 월출산에서 기암괴석을 만끽하며 산행하다보면 잃었던 원기가 돌아오고 온몸에 긍정의 에너지가 쌓이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입춘이 지나고나니 남쪽에서 봄소식이 날아들었다. 겨우내 엄동설한 한 번 없이 지내는가 싶어 따뜻한 날씨가 아쉽기까지 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어찌하랴. 이른 봄맞이 채비를 갖추고 부리나케 남쪽으로 줄달음 했다. 그런데 아뿔싸 봄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한껏 들뜬 일행의 눈앞에 새하얀 설산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서쪽 하늘이 열리면서 구름 사이에서 빛내림이 생겨났다. 지천에 눈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氣)세 등등한 골산과 만나다
해가 바뀌고 1월을 지나 2월 달력을 펼쳤지만 겨우내 이렇다 할 추위는 없었다. 코찔찔이 시절엔 겨울이 그리도 춥더니 요즘은 추위가 예전만 못한 듯싶다. 그 시절 뚜렷한 사계절을 자랑스레 부르던 '아 대한민국'의 노랫말이 무색하다. 추위를 원체 싫어하지만 겨울은 추워야 맛이거늘, 아쉽다.
남쪽에서는 나뭇가지에 물이 오른다는 소식이 일찌감치 들려왔다. 아무리 따뜻해도 그렇지 때 이른 봄소식이 사실인지 궁금해졌다. 며칠 달력을 만지작대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대충 채비를 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봄이 왔다는데 먼저 가서 보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초입은 쉽지만 길 양쪽으로 조릿대 군락이 마중을 나오면 반길 새도 없이 길은 오르막을 향한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선을 그은 듯 고속도로를 타고 봄을 향해 달렸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영암. 나주평야가 펼쳐진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월출산(809m)의 봄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산은 계절을 더디 품는다지만 봄이 산의 발밑까지 닿았을 때 너그러이 계절을 수용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영암에 발도 들이기 전인데 아이를 품는 어머니처럼 따스함을 끌어안은 월출산의 풍광이 눈에 선했다.
영암의 울타리를 넘자 저 멀리 하늘에 맞닿은 웅대한 봉우리가 보인다. 월출산이다. 1000m도 넘지 않는 높이의 산이 이토록 근엄함을 갖출 수 있을까. 가까이도 가기 전에 오금이 저린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온몸을 두른 골산의 기세가 마치 단단한 근육질의 장군처럼 느껴진다. 천하를 호령하며 영암을 수호하는 산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봄을 시샘하는 겨울이 머무는 자리
들머리인 천황사에 다가서니 산에서 뿜어내는 기가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택리지>를 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월출산은 화승조천(火昇朝天)의 지세"라고 했다. '월출산의 산세가 마치 아침에 하늘로 타오르는 불꽃같다'는 말로 산이 뿜어내는 기가 대단하다는 의미다.
봄소식을 찾아 영암까지 내려왔는데 월출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젠 챙겨오길 다행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월출산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온몸을 둘렀다. 이 돌의 80%는 사람에게 이로운 원석외선을 방출한다는 맥반석으로 이루어졌다니 그 사실이 놀랍다. 월출산과 마주하고 있으면 산에서 뿜어내는 기에 눌린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명산이라지만 평일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차분히 오르내리기에 좋겠다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산 위에 눈이 내리고 있어요" 여기자의 격앙된 목소리에 정상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봉마다 먹구름이 시커멓게 올라앉아 새하얀 눈발을 뿌려대고 있었다. 남쪽엔 봄이 왔다고 해서 신이 나서 왔는데, 낭패다.
봄이 목전에 왔다지만 겨울은 월출산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아이젠 챙겨오지 않았음 어쩔 뻔 했어" 배낭을 꾸리며 한마디씩 한다. '짐이 되면 어쩌나' 싶어 챙기기를 망설였던 장비가 이렇게도 반가울 줄이야. 아이젠과 여분의 옷 등을 배낭에 챙겨 메고 재빨리 들머리를 지났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고 있어 시원한 바람에 향긋함이 배어난다. 몇 걸음 내딛지도 않았는데 산이 내어준 건강식이라도 챙겨 먹은 듯 폐까지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겨울을 지나고 있는 바람폭포
초입은 의외로 쉽다. 산이 주는 평온을 오감으로 만끽하며 걷기에 더 없이 좋다. 하지만 여유는 짧았다. 길 양쪽으로 조릿대 군락이 마중을 나오면 반길 새도 없이 길은 오르막을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긴장하는 게 좋다. 풍광은 좋으나 걷기에는 녹록치 않으니 말이다. 골산 특유의 가파른 경사가 길을 막아선다. 암릉을 따라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위험한 구간엔 데크와 계단이 튼튼하게 놓여있다. 길은 돌길과 흙길이 반복돼 산을 즐기는 사람에겐 오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상은 했지만 폭포는 한겨울이었다. 가파른 15m 절벽을 부여잡고 크고 작은 고드름이 빼곡이 매달려 있었다.
봄 생각하고 왔건만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은 영락없는 겨울왕국이었다. 설산을 찍겠다고 지난 몇 달 동분서주하며 올랐던 산들과 비교해도 눈 풍경 하나는 으뜸이다. 봄소식 전하겠다고 영암까지 내려왔는데, 취재팀에게 마냥 신나지는 않는 아이러니다.
오르막은 바람폭포까지 이어진다. 예상은 했지만 폭포는 한겨울이었다. 가파른 15m 절벽을 부여잡고 크고 작은 고드름이 빼곡이 매달려 있다. 이곳은 해가 중천에 뜨는 대낮이 아니면 하루 중 대부분이 응달이라 월출산이 봄을 품고도 온기가 가장 늦게 찾아드는 곳이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 역시 봄기운 가득한 월출산에서 유일하게 싱싱한 고드름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가을에 다시 오리라던 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비슷한 시기에 월출산을 찾은 것이 미안스럽다.
수년이 지나고도 석간수는 그때 그대로 맑은 물을 내어준다. 바가지에 한 가득 담아 벌컥벌컥 넘겼다.
수년이 지나고도 석간수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맑은 물을 내어준다. 바가지에 한 가득 담아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넘겼다. 그러고 보니 폭포가 올려다 보이는 사방에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세월을 몸으로 견디다가 100년도 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나약한 사람만 변한다. 묵묵히 시대를 관망하는 자연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의 모습을 어찌 생각할까. 물 한 모금에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다. 마음의 매무새가 단정해진다.
월출산 명물, 여섯 형제와의 재회
바람폭포에서 길이 갈린다. 구름다리로 오르는 길과 바람골을 따라 천황봉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다. 사실 월출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황사에서 시작해 천황봉~구정봉~억새밭~도갑사로 향하는 총 9.5km 코스와 천황사에서 구름다리~천황봉~바람폭포~천황사로 원점 회귀하는 6.6km 코스, 천황사 코스로 올랐다가 정상에서 전남 강진군에 속한 경포대 방향으로 하산하는 6.1km 코스, 도갑사에서 출발해 억새밭과 바람재를 지나 경포대로 향하는 7.3km 등이다.
구간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월출산의 풍광은 이제 막 겨울왕국에 도착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통천문은 한자 의미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코스는 바람폭포에서 구름다리를 거치는 코스와 바람골을 지나는 코스로 나뉜다. 정상에 닿지 않고 구름다리에만 올랐다가 바람폭포 쪽으로 원점 회귀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의 체력이나 여건에 맞춰 도전할 수 있어 좋다.
바람골에 오르니 바람이 세다. 바람폭포에서 올라온 바람과 정상에서 내리치는 바람이 만나니 오죽 반가울까. 능선을 따라 바람이 올라탄 초목이 춤을 춘다.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정상에 가까워지니 눈발까지 날렸다. 설산을 찾아 지난 몇 달간 강원도를 찾았던 때보다 풍광은 더 겨울에 가까웠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니 육형제바위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마주하니 가까운 지인을 만난 듯 반갑다. 수년 전 만났을 땐 올망졸망 꼬마 형제 같더니 어느새 의젓함이 묻어난다. 여섯 바위는 그때 그 모습일 텐데 찾는 이의 마음이 바위에 형상화 되는가보다. 오순도순 늘어서서 힘껏 솟은 봉우리의 우애가 그저 부럽다.
15분쯤 더 올랐을까. 통천문에 도착했다. 바위 사이로 사람 한명이 드나들 만한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다. 어찌나 신기한지 한자 의미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진다. 이곳을 지나야만 하늘 황제가 머무는 천황봉(天皇峰) 정상에 오를 수 있으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하늘을 열어 봄을 맞이하다
이곳을 지나면 곧 바로 정상이다. 디디고 있는 발아래를 제외하면 사방 천지가 훤히 열린다. 올라오면서 마주한 풍광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정상은 화룡점정을 찍는 듯하다. 월출산 정상은 여느 명산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조망을 가졌다. 영암 벌판 어디에도 월출산과 견줄 봉우리가 없어 마치 구름에 올라앉아 인간의 땅을 내려다보는 신선이 된 느낌이다. 국내에 1000m가 넘는 고산이 40개가 넘는데도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이유가 충분하다.
정상부근엔 나뭇가지마다 때 아닌 상고대가 지천에 피어있었다.
조선 세조 때 시인이며 생육신이었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월출산을 바라보며 "남쪽에 있는 마을 그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이 맑은 하늘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라고 했다. 영암 어디에서도 올려다볼 수 있는 산이니 해가 뜨고 달이 떠오르는 산임에 분명하다. 영암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영험한 기운을 가진 산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영암이라는 지명도 신령한(靈) 바위(巖)라는 뜻이다. 월출산의 기와 신령함이 고장을 지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렇게 풍광이 아름다운데 날씨가 흐려서 조금 아쉽네요. 봄 기운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름다운 풍광이었지만 찬 기운을 머금고 잔뜩 흐려 있는 날씨는 야속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쪽 하늘이 열리면서 구름 사이에서 빛내림이 생겨났다. 사방이 밝아지는 듯하다. 빛은 일행 쪽으로도 향했다. 지천에 눈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월출산이 드디어 봄을 맞는 건가. 신령한 바위라더니 대단하네" 월출산의 신령한 기운이 순식간에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정상까지 올라오며 찼던 숨이 온대간대 없이 사라졌다.
국내에 1000m가 넘는 고산이 40개가 넘는데도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월출산은 아름답다.
환상적인 빛내림에 한참을 멍하니 열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동의 여운은 구름이 빛을 가리고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월출산을 끌어안고 있는 구름이 예사롭지 않다. 금방이라도 어두움과 함께 눈이라도 뿌려댈 듯싶었다.
화강암 골산 양 어깨에 수놓은 다리
부리나케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리막으로 향했다. 기암괴석의 절경을 만끽하고 싶다면 내리막은 사자봉 쪽을 통해 원점회귀 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신이 큰 정으로 쪼갠 듯 절묘하게 꺾인 봉우리에 어찌 설치했는지 놀라울 정도인 철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사자의 옆모습을 그대로 닮은 사자봉도 볼거리다. 이 코스로 하산하면 자연스레 구름다리를 지나 원점회귀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불가! 겨울철엔 일정기간 출입을 통제하는데다 눈이 내리면 날짜를 불문하고 출입불가다. 다소 위험한 구간이 있어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던지는 공수표지만 봄이 월출산을 끌어안거든 꼭 다시 오겠다고 산과 약속했다.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은 골산의 양 어깨, 시루봉과 매봉에 예쁜 빨강으로 수놓은 자태가 아름답다.
오늘은 바람폭포 갈림길을 통해 구름다리에 오르기로 했다.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어 발걸음이 분주했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지난달처럼 밤이 되겠어요" 해가 떨어지고도 여러 시간 산행했던 지난달이 떠올라 조바심이 났다. 누구 할 것 없이 걸음에 속도를 냈다. 갈림길에 도착하고 바로 오르막을 탔다. 제법 가파른데 힘들다고 투덜거릴 틈이 없었다. 누구 하나 말도 건네지 않고 씩씩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겼다.
구름다리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은 골산의 양 어깨, 시루봉과 매봉에 예쁜 빨강으로 수놓은 자태가 아름답다. 120m 낭떠러지의 아찔한 높이보다 구름다리와 산의 절묘한 조화가 더 눈에 띈다. 마치 신선이 다니기 위해 놓아둔 하늘 통로 같다. 강천산·대둔산 구름다리와 함께 호남의 3대 구름다리로 불린다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눈길을 따라 하산할 때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이젠 착용은 필수, 스틱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하다.
영암 벌판 어디에도 월출산과 견줄 봉우리가 없어 마치 구름에 올라앉아 인간의 땅을 내려다보는 신선이 된 느낌이다.
다리를 건너고 능선 위를 올려다봤다. '이 길로 내려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따금 던지는 공수표지만 봄이 월출산을 끌어안거든 꼭 다시 오겠다고 산과 약속했다. 푸른 기운이 산을 덮을 때 더 기세 등등한 월출산의 신령한 기운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고. 다음의 기약을 산길에 몰래 내려놓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산행정보
월출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황사에서 시작해 천황봉~구정봉~억새밭~도갑사로 향하는 총 9.5km 코스와 천황사에서 구름다리~천황봉~바람폭포~천황사로 원점 회귀하는 6.6km 코스, 천황사 코스로 올랐다가 정상에서 전남 강진군에 속한 경포대 방향으로 하산하는 6.1km 코스, 도갑사에서 출발해 억새밭과 바람재를 지나 경포대로 향하는 7.3km 등이다.
첫 번째 코스는 바람폭포에서 구름다리를 거치는 코스와 바람골을 지나는 코스로 나뉜다. 정상에 닿지 않고 구름다리에만 올랐다가 바람폭포 쪽으로 원점 회귀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의 체력이나 여건에 맞춰 도전할 수 있어 좋다.
이두용 차장 | 사진 양계탁 기자 / music@outdoo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