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는 신발은 가라
조선시대 징 박힌 사갈(남, 여).
걸어 올라가는 등산에 있어서 발의 중요성은 또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평소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발이 편해야 모든 것이 편하다’라고들 생각하고 있다. 이는 생활과 연관된 많은 언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에는 발을 움직이는 첫 걸음을 ‘발동을 건다’라 하고 길을 떠나기 위해 내딛는 것을 ‘발정’이라 하였다. 또 부지런히 걷는 것을 ‘발품을 판다’라 하였고, 오랫동안 걸어서 생긴 발병을 ‘발덧난다’라고 하며 경사가 급한 산 길을 오를때 두 손마저 사용한다 하여 ‘네 발로 걷는다’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날 선비들은 탁족(세족) 모임을 만들어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 발을 씻는 것뿐만 아니라 세속(속세)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몸과 더불어 마음까지 청결하게 하였다. 그것은 남의 더러운 부위인 발을 씻겨주는 것은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인간적인 배려이자 사랑이었던 것이다.
발막신과 고구려 징 박힌 금동 사갈
고구려 징 박힌 금동사갈.
고대 인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아야 했고 산야에서 동물의 사냥과 채집 등으로 구하였다. 그러기에 척박한 환경에 노출된 상태에서 움직여야 하기에 인체에서 중요한 발을 보호하고 부상을 방지하며 보온과 동상 방지에 필요한 용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중에는 ‘다름가죽’이 있었는데 거칠고 빳빳하게 말려진 동물의 생가죽을 펼쳐 여러 번 두둘겨서 부드럽게 만든 후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것을 띠모양으로 길게 잘라 붕대를 감듯이 칭칭 감고 동여매어 풀리지 않게 하는 것을 발싸개(발감개)라고 부르며 발보호용으로 이용하였던 것도 있었다.
또 다른 것은 가죽의 착용감이 좋고 보온력이 높은 가죽털이 안쪽으로 가게 하여 질긴 실로 버선 모양으로 지어 추운 지방에서 사용한 ‘다로기’라 불리던 것도 있었다. 이것은 신발의 원형이라 할 수 있고 무명천으로 만든 버선의 앞부리에 가죽을 넓적하게 덧대 만든 ‘발막신’도 있었다.
그리고 농업이 주된 농경사회에 있어서 추수 후 널린 게 짚이니 이것을 이용하여 신을 삼았다. 그것은 먼저 볏짚을 물을 담궈 적신 후 부풀린 곁풀을 제거한 곧은 짚으로 가느다란 새끼를 꼰 뒤 발모양의 모형 틀에 맞추어 짜는 ‘짚신’도 있었다. 이것은 가장 흔한 재료와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찬바람이 부는 계절 외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재료가 약해 쉬이 해지는 단점이 있어 먼 길을 나설 때는 떠나기 전 몇 켤레를 삼아 개나리 봇짐에 매달고 나서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질긴 섬유질인 삼을 꼬아 만든 ‘미투리’를 삼아 비교적 먼 거리에 사용하였다. 한편 통나무를 파서 윗부분은 발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밑에는 굽을 만든 ‘나막신’을 만들어 비오는 궂은 날 땅이 질어서 곤죽이 된 진창길에 사용하였다.
KBS 진품명품(2006년) 사갈 감정화면.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옛 고구려 시대에 사용한 특이한 신발이 있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BC37~AD668년)는 한반도의 북쪽과 중국의 동북 지방에 접하여 위치하였다. 우리의 고대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국력은 역사적 기록과 여러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과 벽화 속에서 보여주듯이 그 시절의 높은 문화와 영화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에는 개마총이나 삼실총 등 고분 속 벽화에 묘사된 무사가 신고 있는 징 박힌 신발이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우리의 옛 전통신발 사갈인 것이다.
이것은 신발의 윗부분에 다로기나 발목신 등을 얹혀 위, 아래를 접합할 수 있도록 띠 모양의 돌출된 턱이 져 있고 바닥창 테두리에는 윗부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이는 발등이나 발목 부위의 활동성을 고려하여 제작되었는데 연질의 윗부분이 마모되거나 찢겨져 다른 것으로 교체시 하부의 금속 부분을 여러 번 재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좌, 우측의 발바닥 모양으로 생긴 두꺼운 금동판의 바닥 저면에는 사각마디 모양의 금동징을 여러 개 박아 미끄러운 사면이나 빙설에 적합하도록 제작한 것이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300~2000년 전 고구려시대에 지금의 아이젠보다 더 멋있고 기능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금동으로 만든 자랑스런 징 박힌 사갈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갈과 징 박힌 나막신
나막신(남), 나막신(여) 미투리, 짚신, 흰고무신, 검정고무신(위).
조선시대 말 타국과의 대외관계는 국경을 접한 중국을 통해 중심적으로 이루어졌고 근접 주변국인 바다 건너 일본뿐일 정도로 미미한 상태였고 외국과 직접 교류할 정도의 준비가 안된 상황이었다. 그것은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의 [조선 표류기]와 [조선국 기]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간행(1668년)된 이후 조선이 서양에 알려진 이후에도 200여년 동안 외국과 광범위한 교류없이 지나간 긴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몇 번의 외국 선박의 표류나 중국과 교류가 빈번한 서양 국가들의 상인이나 선박들이 근접한 조선을 관심대상으로 여겨 1832년 영국의 로드 암 허스트(The Lord Amherst) 상선과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 와의 교류 정도였다.
그 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후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1866년(고종 3년)에 천주교 학살의 병인박해와 그 해 프랑스 함대 셔먼( General Sherman)호 격침의 병인양요가 있었고 1871년(고종8년)에는 미국의 신미양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쇄국정책을 더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군 가야산 자락에 있는 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 무덤 도굴 미수사건(1868년)이 있었다. 이는 풍수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 왕조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심지어 서울의 중심도로인 종로와 전국 각 도읍의 대로변에 양이척화비를 세울 정도였다.
그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과의 통상을 원하였고 동아시아 정복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여러 열강 중 영국은 세포이 항쟁(1857년)을 겪은 뒤 인도를, 러시아는 항해주 개척에,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미국은 남북전쟁(1861-65년)의 뒷수습 등 식민지 국가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일본은 중세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막부체제가 무너지고 왕정복고를 이룬 명치 천황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명치유신의 성공적인 힘을 바탕으로 1875년 군함 운요호 불법 침입 후 다음해 불평등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인천이 개항되었다.
클레터슈에(밑창에 꼰 삼).
이쯤에서 조선시대 말 개항을 전후하여 사용되던 등산화와 관련된 것들을 살펴보면 종래 전통적으로 산에 오르거나 눈이나 얼음 위를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사용된 사갈과 징 박힌 나막신이 있다. 먼저 사갈은 투박한 통가죽을 가공하여 남성용은 장단지까지 올라가는 장화 모양이었다. 그리고 밑창은 장단지에서 발등을 감싸내리는 통가죽을 고정하여 두 장을 겹쳐 정성들여 질긴 실로 한 땀 한 땀 기운 갖바치의 장인 정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 바닥창에는 열 두 개의 두껍고 튼튼한 송곳니 모양의 징이 박혀 있어 근래의 아이젠보다 빙설에 더 잘 박힐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가죽에는 식물성 기름을 두텁게 몇 번씩 발라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물속에 넣어도 완전 방수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여성용은 체구에 맞게 발목 위까지 올라올 정도의 통가죽을 사용하였으며 발등의 앞부리는 버선코 모양으로 가공되어 멋진 모양이다. 그리고 바닥창에는 둥근형 징이 여러 개가 박혔고 가죽에 기름을 여러 겹 입힌 방수용이다. 또 다른 징 박힌 나막신은 발등에는 질긴 가죽을 덧댔고 바닥과 굽은 하나의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다. 또 바닥창에 붙은 바닥굽 끝에는 직사각 막대 모양의 두꺼운 철로 만든 징을 바닥 밑창에 박았으며 가죽 부분에 식물성 기름을 먹였고 나무 부분에는 옻칠을 하였다.
암벽화 클레터 슈에와 클레터 슈즈
조선시대 장마당에 쌓인 사갈.
위와 같은 가내에서 직접 만들어 쓰던 종래의 신발들이 종적을 감추게 되었음을 조선시대말 사진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수공업으로 제작된 질기고 단단한 구두 형태의 징박힌 사갈들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도 있다. 그것은 상품화되어 판매키 위해 저자거리 장마당에 수북히 쌓인 것에서도 알 수 있고 남성용, 여성용이 뒤섞여 있는 것도 보인다. 이즈음엔 성별과 신분의 상관없이 일반 서민들이 모두들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개항이 되고 문호가 개방되어 선진화 된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물품이 일본의 중개무역 형태로 수입되었다.
통가죽 암벽화.
코오롱 암벽화.
R·F 암벽화
그 중에는 고무신과 운동화 등이 반입되어 이전에 소규모 수공업으로 만든 전통의 신발은 서서히 사양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요인 중에는 당초 찹쌀떡 장사를 시작한 이하영이란 사람이 나라가 찬탈당한 그 와중에 친일 행적의 대가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독점권을 얻어 ‘대륙고무신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한 신발의 영향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때 등산인들이 사용한 장비와 관련된 기록 속 내용을 살펴보면 윔퍼텐트, 폴라텐트, 버너(스토브), 스키, 마닐라삼자일 등은 유럽에서 수입된 것과 야마우치 피켈과 가도다 아이젠은 일본에서 생산된 것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렵던 시기에도 등산화와 스키화를 제작했던 백령회의 엄흥섭과 하켄, 아이젠을 제작한 백령회 창설멤버인 양두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R · F 클레터 슈즈(고무창).
또 엄지발가락 사이가 갈라져 있고 발목을 덮는 범포로 지은 일본군 작업화(일명 지까다비)를 암벽용으로 사용한 기록도 있고 범포나 캔버스 천으로 지어 발목까지 차는 밑바닥 창에 꼰 삼줄을 연이어 고정시킨 암벽전용 등산화를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 클레터 슈에(Kletter Schuhe)는 바위면과의 마찰력은 좋으나 쉽게 닳아 매번 쓸 때마다 보수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고도 하였다. 또 다른 암벽화는 클레터 슈즈(Kletter Shoes)인데 가죽을 뒤집어 안쪽의 부드러운 면으로 발목부분이 잘 구부러지도록 지었으며 창에는 얇은 고무창을 붙인 연질 등산화였다. 그리고 명칭은 독일어와 영어의 합성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월간지 [등산] [산수][산악인]의 광고
R · F 가죽 중등산화.
한라스포츠 가죽 중등산화.
등산화는 등산 장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복장이나 배낭보다 더 먼저 선택하고 다른 어떤 장비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자연조건에 따라 각각의 기능에 맞도록 세분화되어 여러 종류의 고기능의 등산화가 출시되고 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변변치 않은 어렵던 시절 자신의 발에 잘 길들여진 한 켤레의 가죽 등산화를 사시사철 사용하였다.
또 방수액을 잘 바른 후 나서는 길에 긴 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비나 눈 속에서 시작과 끝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등산화의 선택에 있어서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인 면도 있지만 생산업체의 정보도 미흡하여 기껏해야 신문이나 TV 광고에서 얻었다. 열악한 소규모 생산자 입장에서는 그것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프로스펙스 가죽 중등산화.
프로스펙스 경등산화
송림 가죽 경등산화.
K2 가죽 중등산화
K2 고어텍스(경).
그러던 때 전문 산악 월간지의 출간은 절대 필요한 희소식이었으며 1969년 5월 ‘등산’의 창간호와 1969년 6월 ‘산수’의 창간호, 잠시 뒤이어 1973년 12월 ‘산악인’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이때의 월간지 지면에 소개된 등산화 광고를 살펴보면 여성용을 포함한 일반구두를 생산하던 제화점에서 등산화도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문 등산화 제작업체인 송림제화와 레드페이스, K2가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그 중 현재까지 영업중인 전문 등산화 업체는 1936년 일제 강점기 때 판잣집에서 주문 수제화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4대째 기업으로 을지로 3가에서 8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송림제화이다. 또 1966년 국내 최초로 암벽 등산화를 개발하여 지금도 성업중인 레드페이스(현 R•F)와 1972년부터 상호를 한국 특수제화로 시작하여 한국 등산화 상표인 ‘로바’를 탄생시킨 K2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동서양을 넘나든 미끌림 방지 징 박은 신발
1935년 비브람사의 고무 바닥창 개발로 사양길
백제의 징박힌 금동식리(신발)
무령왕릉 출토 금동 식리.
용두, 봉황 양각의 동물미장(지팡이)
백제(B.C.18~A.D.660년)는 한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였고 바다 건너로는 서쪽이 중국과 남쪽은 일본과 근접해 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B.C. 37~A.D. 19년)이 고구려를 일으킨 졸본땅에 유리왕자가 찾아오자 태자로 삼았고 그로 인해 비류와 온조는 따르는 백성과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온조(B.C.18~A,D,28년)는 백제를 건국하였고 그리고 이후 비류는 온조의 백제에 합류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침류왕(384~385년) 원년에 불교가 전래되어 수용하였고 전지왕(405~420년) 원년에는 왕인이 왜나라에 한문 문화를 전파했으며, 552년에는 불교를 전하는 등 앞선 문화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412~419년)때 한성을 침공하여 개로왕(455~475년)의 죽음으로 국도를 웅진(공주)로 옮겼으며 성왕(523~554년)때의 538년에는 사비(부여)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660년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에게 패하고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의자왕(641~660년)이 당나라에서 죽음을 당해 백제는 망하게 되었다.
등산 1969.(6,7)합본 광고.
지금까지 백제지역 13곳에서 17켤레가 출토된 금동식리(신발)을 중심으로 사용 용도와 제작 기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서술한 고구려 고분 속 무사가 신고 있는 것처럼 상, 하부가 분리 제작되어 결합, 교체할 수 있는 구조로 실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백제의 금동신발에 있어서는 일체식으로 발등과 바닥판의 여러 가지 문양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지위가 낮은 서민에게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금을 입힌 금동판에 고도의 기능이 필요한 무늬의 새김 등을 사용하였음은 무덤 속의 주인공이 그 지역의 지배자일 것으로 추측되며 용도는 의례용이나 장례용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바닥판에 있어서 고구려 신발과 같이 금동판에 여러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은 비슷하며 백제 신발은 금동판과 은판을 사용하였고 그 판에 금동징들이 박혀 있으며 앞의 뾰족한 부분이 위로 45°정도 들려 있는 차이점이 있다.
등산(창간호) 1969.5 광고.
또 발등 부분은 두 겹의 판으로 안쪽은 은판을 바깥쪽은 무늬가 새겨진 금동판을 사용하였고 그 금동판은 두 개 내지 세 개의 판을 연결하여 바닥판에 고정하는 형식인데 그 판의 연결방법은 두 쪽은 앞, 뒤에서 세 쪽 사용시에는 뒷부분 좌, 우에서 작음 금동못을 사용 연결되어 있다. 이어서 기 출토된 몇 점의 식리를 살펴보면 먼저 백제 금동 신발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보는 공주 의당면 수촌리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 신발은 바닥판에 용무늬의 바탕에 연꽃의 맞뚫린 모양으로 새겨졌다. 그 신발의 길이는 31.5cm이며 바닥판에는 아홉 송이의 연꽃무늬 중앙에 앞 경사진 부분 세 곳과 중앙부에 세 곳, 뒷부분에 세 곳 등 합하여 아홉 개의 금동징이 박혀 있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으로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발로 보고 있다. 또 나주 다시면 정촌 고분에서 출토된 신발 발등 끝부분에 날아오르려는 용의 얼굴이 선명한 장식이 붙어 있고 이것도 바닥판에는 중앙에 연꽃 모양의 맞뚫린 문양이 새겨져 있고 용을 상징하는 문양도 있다.
산수(창간호) 1969.6 광고.
이 신발의 길이는 32cm이며, 금동판으로 제작된 발목의 덮개를 포함한 높이는 9cm, 신발폭은 9.5.cm로 바닥판에 23개나 되는 많은 징이 박혀 있다. 그리고 공주 금성동에 있는 무령왕(501~522년)과 왕비의 능에서 매지석과 같이 발굴된 금동식리가 있는데 발등의 안쪽에는 은판, 바깥쪽에는 금동판을 사용하였고 그 판에는 거북 등 문양이 화려하게 맞뚫려 새겨져 있다. 이 신발의 크기는 31.5cm이며 바닥 금동판에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금동으로 만든 징이 9개가 박혀 있다. 또 발굴당시 신발을 신고 있던 모습이었으며 신발 안에는 천과 종이 같은 목피의 섬유질이 붙어 있었다.
산악인(창간호) 1973.12 광고.
신라의 금동식리
알파인 클럽 회원들(1865년).
반 고흐 작품 [등산화](1886년).
신라(B.C.57~A.D.935년)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넓은 동해와 남쪽은 일본과 근접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여섯 고을의 족장들이 모여 박혁거세(B.C.57~A.D.4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박 모양의 알에서 깨어나왔고 세상을 크게 밝힐 사람이라 하여 혁거세라 하였다” 라고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법흥왕(514년~540년)때인 527년 불교를 공인으로 받아들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의 쟁탈전을 하던 진흥왕(540~576년)때 고구려의 영토였던 단양을 점령한 기념으로 적성비(551년), 북한산 순수비(555년), 창녕비(561년)를 세웠다. 또 황초령비(568년)와 마운령비(568년)에서 알 수 있듯 진흥왕 때에 진출하였다가 이후에 상실한 곳도 있었으며 근접한 고령의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정복(562년)함으로써 오랜 기간의 6가야 모두 망하게 되었다.
윔퍼의 마터호른 등정장비(1865년).
그 후 무열왕(654년~661년)때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백제가 망하였고 문무왕(6611~681년)때 나 당 연합군으로 668년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구려도 망하게 되었다. 그 뒤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당나라와의 전쟁(670~676년)에 이겨 비록 대동강과 원산만의 이남땅이었지만 삼국을 통일(676년)하는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경덕왕(742~765년)때 김대성이 토함산 기슭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중창하는 등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신라지역(가야 포함)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27켤레의 꾸민 신발(식리)을 살펴보고 특징과 제작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대체적으로 신라의 금동 신발은 백제의 것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나 발등에서 연결되는 두 장의 금동판이 옆에서 이어지는 형식으로 금동못을 사용하였다. 또 발등의 금동판이 바닥 금동판에 물려 안쪽으로 접어 작은 금동못으로 고정하였다. 다음은 기출토된 황남 대총 북분과 남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북분에서 출토된 신발은 같이 출토된 금제 허리띠에 부인대라는 글귀와 다른 곳에서 출토된 신발 크기보다 작은 길이 27.5cm이고 높이는 7.5cm로서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트리코니 암벽화(좌:남, 우:여).
방한화(미국).
Galibier 2중 중등산화(남. 프랑스).
Richard Pontvert 2중 중등산화(남. 프랑스).
Scarpa 중등산화 (남. 이탈리아).
Guida 중등산화 (여. 이탈리아).
그리고 고구려 신발에서 보이는 특징처럼 신발 둘레에 상, 하부를 질긴 실로 연결할 수 있는 구멍들이 여러 곳에 뚫려 있어 상부를 교체할 수 있는 구조인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남분에서 출토된 식리의 안쪽에는 비단을 감싼 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식리총이라 불리는 노동동 126호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신라의 식리와 다른 위판이 세 장의 금동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부분과 뒤쪽의 좌,우에서 연결되는 백제의 신발 제작 방식을 보이고 있다.
구두에서 트리코니 등산화까지
Mizno 클레터 등산화(여. 일본OEM).
스터드 터스 원추형 스파이크 덧신(비브람창).
보통 등산화의 기원을 알프스부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1786년경 몽블랑 등반대의 삽화나 동판화 속에서 목이 긴 등산화를 찾아볼 수 없다. 양모 정장과 모자를 쓴 손님을 모시고 빙하를 건너는 안내인의 발에도 긴 끈의 등산화가 아닌 평상시의 일반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발목에는 단단히 묶인 각반만 보일 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평상시에 착용하는 긴 드레스에 양산을 쓰고 안내인의 보조를 받고 의지하며 따르는 여성 손님의 모습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등산화였던 것이다. 이는 매 번 바뀌는 많은 손님과 동행해야 하며 결과에 따라 더 많은 성공보상금을 기대하며 오르는 직업적인 안내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설원에서 동물과 사투를 벌이는 사냥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시절에는 손에 들고 있는 길이 3m 정도의 알펜스톡이었다면 그 후 8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안내인 개개인이 고안한 가슴높이의 긴 피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등산화에 있어서도 가죽구두 밑창에 못을 박아 사용했는데 그 모습은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 때 사용한 등산화와 알파인 클럽회원들의 사진 속에 찾아 볼 수 있다. 브라이어 들장미 뿌리로 만든 담뱃대를 물고 있는 영국산악회원과 가이드들이 신고 있는 못 박힌 등산화인 것이다.
아솔로 암벽화(이탈리아).
살레와 암벽화(독일).
스카르파 2중 플라스틱 빙폭화(이탈리아).
코플라흐 2중 플라스틱 빙폭화(오스트리아).
비브람 고무창
빙폭화 수납주머니(한국, 써미트).
일반적으로 비브람 등산화(Vibram Shoes)로 통칭되는 비브람 합성고무창은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등산인 바이탈 브라마니(Vital Bramani)가 개발하여 그의 이름을 딴 비브람사를 설립하였다. 종전의 쇠징 박은 등산화의 단점과 클레터 슈에의 단점을 보안하여 고안된 비브람 솔(sole)이라 하는 고무 바닥창을 1935년 개발한 것이다. 쇠징의 무늬를 기본으로 방수가 되면서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고 잘 붙는 바닥창을 개발하였다. 자동차의 스파이크 타이어(spike tire)와 같이 뚜렷한 요철 무늬가 있는 고무 밑창이다. 1938년 이탈리아의 케신이 그랑드조라스 워커 슈퍼 초등에 사용하면서 더 유명해져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월간사람과산/ 글-신성하(해강종합건설 전무이사), 사진-주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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